멜랑콜리아 (2011)

2023. 5. 9. 00:26샷바이샷

 

 지난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우연히 본 영화의 관객과의 대화 자리에서 편집감독이 감독과 함께 자리한 경우가 있었다. 편집 감독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연출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일이 드문 만큼 감독과 편집자 사이에서 오고 간 이야기나 편집을 할 때 신경 쓴 점들을 자세히 들을 수 있어서 특별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때 감독만큼이나 영화의 연출이나 의도 그리고 모든 프로덕션 단계를 꿰뚫듯이 말하는 편집감독을 보며 다시 한 번 느낀 것은, 편집자 역시 한 명의 연출자와 다름 없다는 점이었다.

 

 <멜랑콜리아>, 눈을 단번에 사로잡는 아름다운 미장센과 어지러운 상황에 더해 머리를 뒤흔드는 듯한 핸드헬드 촬영. 그러나 영화를 샷 단위로 나눠서 다시 보았을 때 느낀 것은 이 영화에 숨어있는 편집의 힘이다. 조각조각 난 샷들, 대부분 하나의 상황을 원테이크로 쭉 팔로잉하며 찍은 듯한 화면을 여러갈래로 분절해 수많은 별개의 컷처럼 보이게 만든 마법 같은 편집이다. 편집 감독을 찾아보니 라스 폰 트리에 감독과 약 7편은 함께 한 예술영화계의 베테랑 영화 편집자. 감독의 다른 작품을 아직 보지 못했지만 분명 다른 작품에서도 편집자의 손길이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라 확신한다.

 

 


예측할 수 없이 난사되는 점프

 

영화의 첫 장면 

 영화는 좁은 차 안에서 시작된다. 좁은 공간, 좁은 화면 속에서 어떤 이유에선지 경직된 표정의 신랑과 신부가 어떤 대사도 없이 주변 상황을 살피고 있다. 위급한 상황인걸까, 흔들리는 카메라 안에 갇힌 듯한 인물의 구도, 속절없이 점프하는 컷들은 영화의 시작부터 긴장감을 심어준다. 그때 신부의 입가에 개구진 미소가 지어지더니 카메라는 그런 신부의 미소를 향해 빠르게 줌 인 한다. 어찌보면 당황스러울수도 있는 '보통의' 영화답지 않은 카메라 렌즈의 줌 인이 이 영화에선 내내 이루어진다. 그러나 오프닝시퀀스부터 그리고 지속해서 점프하던 컷들 때문인지 완전히 받아들이기 힘들어거나 어색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차차 익숙해질 뿐이다. 영화는 이런 담백한 첫 씬 하나만으로 앞으로 진행될 영화의 전체적인 리듬을 제시한다.

 

비슷한 앵글에서의 연속적인 점프컷

 첫번째 샷과 원래는 동일한 샷으로 이어갔을 것이라 예상되는 두번째 샷. 이렇게 영화 전반적으로 하나의 테이크에서 후반에서 컷을 함으로서 촬영 단계에서는 시간을 절약하고 인물의 감정선을 이어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마지막 세번째 샷 역시 동일하게 이어갔을 수도 있지만, 편집은 두번의 유사한 구도의 점프컷 사용은 피한다. 마지막 클로즈업 전에 저스틴의 P.O.V인 별이 수놓인 밤하늘 샷을 삽입한다. 여기서 영화의 예측할 수 없는 점프컷들이 사실 무지성으로 점프하는 것이 아닌 철저하게 중복되지 않게 구성되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단순히 보면 규칙 없어보이는 점프컷들이지만 사실 아무 곳에서나 컷하지 않는다. 예측불가한 점프들 사이에도 나름의 규칙이 존재하는데, 이런 규칙들이 영상적인 완성도를 올린다. 특히나 점프컷이 마구 난사되며 저스틴의 충동적인 감정 폭발을 보여주는 서재 장면을 살펴보며 나름의 규칙을 찾아보고자 한다.

 

샷 사이에 자주 삽입되는 P.O.V
감정을 대변하는 점프컷 속 역동적인 카메라 무빙과 줌 인의 사용
첫번째 컷과 두번째 컷은 분절되어 있다.

 

① 2번 이상 동일하게 비슷한 앵글에서 점프하지 않는다.

② 점프 직전 카메라는 빠르게 줌 인 한다.

③ 점프 직전 카메라는 좌측 또는 우측으로 빠르게 패닝한다.

④ 점프 직전 인물이 화면 안에서 빠르게 사라지거나 움직인다.

 

 이와 같이 두 번 이상 같은 방식을 사용하지 않고 적절하게 P.O.V 혹은 인서트샷을 삽입하는 방식도 있다. 앞선 규칙들을 적절하게 섞어서 샷들을 나누되,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 점프하면 안정적이지만 시각적인 긴장감을 줄 수 있다. 이러한 컷의 분할 방식과 원활한 후반 작업을 위해 프로덕션 단계에서 세컨드 카메라를 사용했을 가능성도 무시하지 못한다.

 

 


피사체를 잡아먹는 공간의 힘

 

 강렬한 오프닝시퀀스, 팬텀 고속 카메라를 활용하여 시각적인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여기서 나왔던 동일한 장소와 비슷한 상황들이 영화 내에서 계속 등장하는데, 오프닝 시퀀스에 비해 더할나위 없이 평범한 샷이지만 비슷한 느낌이 불편한 기시감을 준다. 두개의 행성이 뿜는 빛으로 해시계와 나무, 인물들의 그림자가 두 갈래로 나누어지는 것 역시 이 영화 내내 점프컷으로 만들어낸 시간 연속성의 파괴를 상징한다.

 

 서사의 사이사이마다 끼워진 이런 샷들은 어찌보면 누군가 지켜보는 시점샷처럼 느끼게도 하고 인물의 외로움, 내제된 우울, 멜랑콜리함을 느끼게 한다. 더해서 이 샷들을 이상하게 느끼게 되는 이유는 원근감 때문이다. 어떤 물체를 인물 옆에 동일한 크기 혹은 더 커 보이게 앞에 배치함으로서 프레임 내에서 인물의 주도권을 없애고 무력하게 보이게 만든다. 하객들이 전부 떠난 식장 쌓인 의자에 혼자 앉아 있는 저스틴, 커다란 창문 밖 풍경보다 아래에 위치한 클레어. 두 행성의 빛이 만들어낸 거대한 나무 그림자 사이로 빨려들어가듯이 사라지는 저스틴의 작은 뒷모습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흐리게 만든다. 주방에서 과일을 손질하는 집사를 가둔 프레임 앞에 피사체보다 거대하게 위치한 촛대, 마찬가지로 작은 소년 레오의 옆에 비슷하게 혹은 더 크게 위치해있는 가구, 망원경. 이렇게 거프레임 속에서 인물보다 거대하게 시선을 빼앗는 물체들은 인물을 덧없이 빈약하게 만든다.

 

 


절망의 상황 평화의 화면

 

 극의 절정으로 치닫기 전 상황을 시간의 유지와 점프를 활용해 긴장감을 끌어올리고 반전의 신호탄을 쏘아올린다. 

 

좌측 패닝

 이전 씬에서 서로 안도의 한숨을 쉬며 웃는 클레어와 저스틴의 모습에서 빠르게 심각한 존의 얼굴로 전환되며 시작한다. 줌아웃되고 차츰 그에게서 멀어지던 카메라는 갑작스럽게 퀵패닝하여 집에서 나오는 클레어를 줌 인으로 주목하게 만든다. 빠른 카메라의 무빙에 비해 여유있는 클레어의 움직임과 부드러워진 표정이 대조된다. 

 

B.S 팔로잉

 바쁜 존에게 더 비중이 실어진 투샷. 카메라는 투샷의 중심을 유지하지 않고 대사와 움직임에 따라서 두 사람 사이를 왔다갔다 한다. 마실 것을 권하는 클레어를 향했다가, 거절하는 존에게 갔다가, 다시 되묻는 클레어에게 치우친 샷에서 컷.

 

 이전 컷에서 갑작스럽게 점프해 커피를 마시는 클레어의 샷에서 시작하여 줌아웃, 클레어의 시선을 받아 다시 바쁜 존을 잠깐 스치듯이 찍고 다시 움직이는 클레어에게 향한다. 평화로운 상황에 비해 바쁜 카메라 무빙은 심상치 않은 문제가 생겼음을 예상하게 만든다. 그대로 카메라는 존이 아닌 클레어에게 붙으며 팔로잉 머리를 넘기는 순간 컷.

 

클레어 B.S 팔로잉 줌인

 클레어의 위치를 바로 의자에 앉는 순간으로 점프해버린다. 공간의 연속성도, 연속성을 위한 구도나 샷사이즈의 변경이 전혀 없는 점프컷임에도, 머리를 넘기는 액팅에서 받아 자연스러운 느낌이 들게 만든다. 누워서 존을 지켜보는 클레어의 모습을 줌 인 하며 컷.

 

존 클레어 투샷 ㅡ 줌인 ㅡ 존 B.S 

 다음 컷은 비교적 사이즈가 멀어졌지만 중심인물은 역시나 클레어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서서히 화면 우측 끝에 위치한 존의 심각한 얼굴로 포커스 인 - 줌 인을 동시에 진행하며 이목을 집중시킨다. 우리 또한 이 부분에서 예상치 못한 심각한 상황이 도래했음을 눈치챌 수 있다.

 

존 L.S ㅡ 우패닝 ㅡ 클레어

 존의 후면 단독 롱샷에서 우측으로 패닝해 클레어의 모습을 비춘다. 평범한 샷처럼 보이지만 두 사람의 거리감과 원근감을 이용한 점이 눈에 띈다. 특히 위와 같이 샷을 이어서 배치하니 마치 소인과 거인처럼 느껴지는 매력있는 구도 같다. 여기서 그치치 않고 한 번 더 줌 인하여 존을 완전히 아웃시키고 완전히 클레어의 샷으로 만들어버린다.

 

클레어 C.U

 클레어가 뒤척이다 잠에 드는 모습을 길게 보여주고 다음 컷에서 역시 거의 동일한 샷 사이즈와 앵글에서 점프한다. 영화는 끊임 없이 시간의 연속성과 영화 화면의 규칙을 파괴한다.

 

클레어 팔로잉 롱테이크

 포커스 아웃된 상태에서 포커스 인 하는 클레어의 모습에서 시작하며 시간의 경과와 잠에서 깨는 상태를 표현한다. 또 일어난 클레어의 움직임에서 받아 사라진 존의 자리를 패닝하여 잠깐 비췄다가 곧바로 클레어에게로 넘어온다. 클레어가 이때 잠깐 손에 든 컵을 바라보는데 이때 카메라 역시 완전히 컵을 잡진 않지만 잠깐 부자연스럽게 아래로 향하는 것이 의도였나 싶었는데, 아이레벨을 유지하던 카메라맨이 미리 일어서며 크게 흔들린 실수 같다. 그러나 다시 돌아오는게 마치 당황한 감정을 나타내는 것 같아 자연스럽게 느껴졌고, 이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미리 일어선 카메라 덕분에 부감이 된 카메라가 곧잘 안정적이게 망원경과 클레어의 투샷 구도를 잡는다. 망원경 속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갈등하는 클레어의 모습을 줌 인 하여 부각한 뒤, 기구를 집는 클레어를 제자리서 팔로잉하여 손에 든 기구를 줌 인 하고 다음 컷으로 넘어간다. 이때부터 샷 하나의 길이가 매우 길어지기 시작하고 긴장감을 쌓기 시작한다.

 

클레어 C.U 롱테이크

 줌 인한 컷은 자리에 빠르게 앉는 클레어의 모습에서 받는다. 역시나 시간과 인물의 동선을 가차없이 점프해버리지만 프레임 내에서의 피사체의 움직임이나 카메라 자체의 움직임으로 마치 트렌지션으로 넘어가는 듯한 효과를 준다. 자리에 앉자 멜랑콜리아를 바라보는 클레어의 표정으로 카메라가 줌 인 하고 꽤 오랫동안 그의 표정을 잡는다. 그리고 충분히 보여줬을 쯤 시계를 꺼내는 그의 액팅에서 받아 바쁘게 카메라가 손을 따라 팔로잉하기 시작하고 다시 화면 안에 클레어의 측면이 자리잡는 순간 다음 컷으로 전환된다.

 

P.O.V

 손에 맞춰져 있던 포커스는 뒤로 흐릿하게 보이던 멜랑콜리아로 포커스 인하고 컷.

 

클레어 C.U 팔로잉

 클레어의 얼굴에서 철사로 틸트업, 손을 내리는 액팅을 받아 그대로 다시 클레어의 얼굴로 줌 아웃하며 팔로잉한다. 잠시 동안 클레어의 무념한 얼굴을 보여주다가 이번엔 내리까는 시선을 받아 얼굴이 아닌 하반신에서 다음 샷으로 컷해버리는 것도 특이한 지점이다. 역시 시간의 점프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비교적 다음 컷과 유사한 앵글에서 자른다.

 

손 ㅡ 틸트업 ㅡ C.U

 이전 컷에서 바로 시계를 보는 손으로 툭 튀어 단숨에 5분의 시간을 점프해버린다. 그리고 이어지듯 클레어의 얼굴로 틸트 업. 

 

P.O.V

 역시나 철사에 또렷하게 맞춰져 있던 포커스는 몇 초 후 빠르고 갑작스럽게 뒤에 있는 멜랑콜리아를 비추고 바로 컷을 한다. 이전부터 서사에 무관한 샷들은 이상할 정도로 길게 보여주는 반면에, 서사의 전환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정보성 인서트는 짧고 거침없이 넘겨버린다.

 

클레어 C.U

 멜랑콜리아가 궤도를 틀어 지구로 다가왔음을 깨달은 순간. 영화 속 그 어떤 장면보다 갑작스럽고 충격적인 순간이지만, 어떤 빛이나 사운드의 전환도 없이 적막하다. 남편은 사라지고, 넓은 대저택 안은 클레어의 목소리만 울려퍼진다. 시끄럽던 말들의 소리는 언제 그랬냐며 죽은 듯 고요해진다. 정말 위기의 상황에선 수많은 편집과 기교를 절제한다. 끊임없이 분절되어 튀던 샷들이 지휘자의 종지 신호에 순식간에 숨을 죽이는 것처럼.

 

 


장면의 멜랑콜리를 더하는 음악

 영화 오프닝씬부터 반복적으로 삽입되던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1막 전주곡. 매우 웅장한 이 음악이 사용되는 순간 역시 서사적으로 어떤 중요한 역할을 하는 화면도, 인물들이 갈등을 빚는 상황도, 하물며 절망적인 순간도 아니다. 일상적이고 평화로운 순간 서서히 고조되며 삽입된 웅장한 오페라 음악은 극의 알수없는 긴장감을 더한다. 식장을 갑작스럽게 빠져나온 저스틴이 골프장 한 가운데서 소변을 보는 장면, 서재의 추상주의 그림들을 모두 낭만주의 그림으로 바꾸는 장면, 말을 타고 달리는 장면, 나체로 연못에서 멜랑콜리아의 빛을 받는 장면 등 주로 고요하고 서사적으로 아무런 역할이 없는 장면들이다. 그래서일까 이상한 장면들과 반복적으로 흐르는 음악은 이 장면들을 너무나 이질적으로 만들지만, 한편으론 현혹될 만큼 아름답게 느끼게 만든다.

 

 


대사 없이 흐르는 느리게 흘러가는 종말 직전의 순간

 

절정의 순간 찾아온 리얼타임

 

 한 장면을 3분 동안 보여주는 이 씬은 다른 장면보다 훨씬 길게 느껴진다. 멜랑콜리아가 다가오고 있음을 실감하게 만드는 인물들을 감싸는 빛과 고동치듯 커지는 음악소리. 마구잡이로 시간과 공간을 점프하던 이전 씬들과는 달리 리얼타임으로 서서히 다가오는 종말의 순간에서 짓는 세 사람의 표정만을 교차로 배치한다. 시키는대로 눈을 꾹 감고 있는 레오, 소리없이 아우성치는 클레어, 체념한걸까 혹은 기다린걸까 무색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는 저스틴까지. 오랫동안 그들을 반복해서 비추는 카메라는 이 순간 세 사람의 감정의 대비를 더욱 도드라지게 만든다. 

 

 2장에서 내내 화면에 상주하며 영향력을 끼치던 멜랑콜리아는 이 긴 시간 동안은 타이트한 샷들을 통해 밖으로 배제되다가, 비로소 영화의 마지막 장면의 넓은 롱샷에서 그 강력한 존재감을 보여주며 세 사람을 삼켜버린다. 우울과 병행하는 삶이란 그런 것 같다. 어느때에는 강한 불안과 두려움을 심어주다가도, 또 시간이 흐르다보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희망이 생기기도 한다. 그러나 또 돌고 돌아, 어느새 지구에 충돌하는 혜성처럼 눈 앞에 다가와 버리고 준비되지 않은 순간이 찾아와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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