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4. 3. 23:47ㆍ샷바이샷
<더 레슬러> 제목 그대로 프로레슬러의 인생을 담은 영화. 영화가 시작되고 약 2분가량 쏟아지듯 지나가는 수많은 기사들과 오프닝 시퀀스에선 1980년대 프로레슬러 '램'의 화려한 시절을 보여준다. 빠르고 강한 비트의 음악과 끝없이 이어지는 경기의 중계음은 움직임 없이 별도의 정지된 이미지와 텍스트만 지나가는데도 램의 위상을 강하게 느끼게 해준다. 마치 히어로 영화의 오프닝 같기도 하고, 만화 캐릭터 같기도 하고 비현실적일 정도로 느껴질 정도이다.
그러나 이 오프닝 시퀀스가 끝난 후 곧바로 등장하는 랜디의 모습에선 이런 전성기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고정되었지만 미묘하고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카메라는 늙고 불안정해진 그의 생계만을 드러낼 뿐. 휘황찬란한 시간을 보냈던 프로레슬러 '램'으로서 강하고 아름답던 시대는 이제 없다는 듯 인물을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곳으로 떨어뜨려버린다. 그때부터 우리는 깨닫게 된다. 이 영화는 스타 프로레슬러이자 영웅이었던 '램'의 이야기가 아닌 이젠 인간 '랜디'가 된 남자의 인생을 담은 영화인 것을.
핸드헬드 백 팔로잉
영화는 모든 컷을 핸드헬드로 촬영하였다. 오랜시간 동안 쫓아가는 카메라는 분명 한달이 채 될까 말까 하는 시간이겠지만 마치 랜디라는 인간의 삶 전체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듯 꾸밈이 없고, 사실적이다. 특히나 자주 사용되던 인물의 뒤를 쫓는 백 팔로잉은 랜디가 어떤 장소에 드러설 때 혹은 어떤 상황에 마주했을 때 카메라의 워킹과 함께 더 강한 효과를 만들어낸다.
첫번째, 영화의 극초반부에서 경기를 마치고 복도를 통해 밖으로 나오는 랜디의 모습에선 이전 컷과 연결되어 몹시 불안정하고 지친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긴 복도의 푸른색 조명이 그런 불안감을 증폭시킨다. 그의 전성기에서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듯 싸인을 요청하는 팬이 등장하고, 작고 낡아보이는 경기장을 캐리어를 직접 끌고 빠져나가는 모습을 어느 순간 그를 쫓아가던 카메라가 멈춰서서 보내주며 그를 한없이 작고 조촐하게 만든다.
두번째, 경기를 끝낸 후 혹은 경기를 시작할 때에도 어김없이 핸드헬드 백 팔로잉이 사용된다. 하드한 경기를 끝내고 링을 빠져나가는 그의 등에선 경기의 난이도를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수많은 상처가 그대로 보여지고, 이를 더 부각시키듯 그를 향해 쏘아지는 붉은 조명은 마치 온 몸을 피로 얼룩진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또 지친 그의 모습을 대변하는 듯, 카메라는 어쩌면 평소보다 더 흔들리듯 불안정하게 쫓아가다가 반짝이는 스포트라이트와 관중의 함성소리가 잦아들 쯤 이와 대비되는 어둠속으로 사라진다. 반면 똑같은 백 팔로잉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경기를 입장하는 모습에서는 마치 후광처럼 보이는 빛들과 관중들의 이미지가 랜디 주변을 가득 채운다. 비슷한 앵글임에도 전혀 다른 감정, 설렘에 가까운 긴장감과 웅장함을 느끼게 한다.
특히 영화 중반부, 레슬링을 그만 두고 마트 정육점에서 일하러 가는 랜디를 화장실에서부터 카운터까지 거의 2분 가량 쫓아가는 가장 긴 롱테이크가 기억에 남는다. 영화 전체적으로 컷 하나하나의 길이가 길긴 하다. 중간중간 불필요한 부분은 점프컷으로 가감없이 잘라내는 모습도 있었지만, 그러나 이 컷만은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명찰을 달고, 마트 사무실과 창고를 빠져나가는 내내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이는 이 씬이 프로레슬링을 그만 두고 새롭고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랜디의 결단, 그러나 사실 그런 변화를 누구보다 두려워하는 그의 감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씬이기 때문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듯 새로운 삶, 카운터에 가까워질수록 아른아른 들려오는 경기장의 함성소리가 커진다. 그리고 마침내 카운터 앞에 다다랐을 때 멈춰선 그의 뒷모습이 밖에서 쏟아지는 강한 빛으로 인해 실루엣으로 보여지고 함성소리와 더불어 마치 레슬링 경기장 같은 웅장한 공간감을 만들어낸다. 영화 전체적으로 깔린 유사한 백 팔로잉 구도는 랜디의 현실적인 삶이 결국 하루하루 살아남기 위한 하나의 경기였다는 것을 이미지적으로 보여주는 장치가 아니였을까 싶다.
백 팔로잉 구도에서 화면의 반을 차지한 거대한 랜디의 뒷모습, 그리고 좁은 화각은 시야를 한정적이게 만들어 답답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안정감 없이 마구 흔들리는 앵글은 랜디가 처한 상황과 감정을 극대화시켜 때로는 불안정함과 두려움을, 또 때로는 보는 우리에게 하여금 긴장감 혹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선사한다.
수많은 갈등이 랜디 앞에 나타나지만, 정서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랜디는 선하고 강한 사람이기에 함부로 그를 위축시키는 앵글을 사용하진 않았다. 또 주인공인 그와 관객을 일체화시키기 위하여 대부분 아이레벨을 사용한 점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약물과 유흥으로 경제난에 시달리는 랜디의 상황을 부각시키기 위해 마트에서 고용인을 만날 때 만큼은 랜디를 부감으로 촬영하였다. 고용인의 위치를 보여주기 위해서 처음부터 아주 높은 곳에 위치시키거나, 비슷하게 걷고 있다가도 멈춰서는 지점에서는 랜디를 계단 아래, 고용인을 계단 위쪽에 배치하여 갑을관계를 상기시킨다.
이런 백 팔로잉은 영화 전체적으로 주인공인 랜디에게서만 볼 수 있는 줄 알았지만, 랜디가 아닌 다른 사람의 단독 백팔로잉을 사용할 때가 몇 번 있다. 바로 캐시디, 팸이다. 한 아이의 엄마이자, 밤에는 유흥업소의 스트리퍼. 그 역시 나이 때문에 일하는 도중 수많은 모멸감을 느낀다. 램(랜디)와 비슷하게 직업적으로 명암이 다른 인물인 것처럼 이름도 두개를 가지고 있으며 여러모로 랜디와 비슷한 점이 많다. 그를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유사한 앵글이 사용된다.
카메라의 비약적인 거리두기
영화 내내 핸드헬드로 끈질기게 랜디를 쫓던 카메라는 다소 갑작스럽게 멀어지기도 한다. 경기를 마치고 작고 오래된 대기실에 혼자 앉아있는 모습, 집세를 겨우 마련해 집주인에게 주는 모습, 재미없는 게임에 아이가 떠나버리고 혼자 남은 모습, 방 안에서 딸의 연락처를 찾아보는 모습, 병원을 나와 지팡이를 짚고 집으로 향하는 모습, 밖으로 나와 얼마나 뛰었을까... 결국 숲에서 주저 앉아 거친 숨을 뱉는 모습 등. 특히 심장질환으로 인해 더이상 레슬링을 할 수 없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게 된 이후부터 이런 앵글은 그를 더 작고 불안정하고 초라한 존재로 만드는데, 이때 영화의 톤이 처음보다 눈에 띌 정도로 어두워진다. 색채는 잘 찾아볼 수 없을 뿐더러 명암이 짙어져 어두운 부분은 완전히 캄캄하게 죽여버린다. 가까스로 기적처럼 살아났지만, 레슬링을 하지 못하게 된 랜디를 마치 '죽은 사람'처럼 만들어버리는 화면과 구도이다.
회복과 교류,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를 순간에서야 찾아온 안정적인 구도
위태위태했던 핸드헬드 팔로잉 무빙은 관계의 회복, 진심어린 감정의 교류가 이루어지는 순간에는 안정적인 화면을 만들어낸다. 스테파니에게 참회를 하고 잠시나마 행복한 시간을 보낼 때 백 팔로잉보다는 인물의 정면(얼굴)을 보여주는 구도를 주로 선택했고, 이는 사랑하는 여자 팸과 바에서 맥주를 마시며 솔직한 이야기를 나눌 때도 마찬가지이다. 흔하고 별다를 것 없는 리버스샷의 배치이지만, 이 영화처럼 내내 불안정하고 거친 팔로잉과 롱샷의 배치를 반복했을 경우에는 이런 샷들에서 흐르는 감정과 대사의 깊이가 다르게 느껴진다.
영화 내내 그의 뒤를 놓칠듯 말듯 그림자처럼 쫓으며 불안정하게 흔들렸던 카메라, 그리고 레슬링을 그만둔 후 마치 그를 이미 죽은것처럼 어둡게 묘사하던 화면은 마지막 경기에서 언제 그랬냐는 듯 안정적이고 정상적인 화면으로 돌아온다. 항상 아슬아슬하게 겨우 따라가던 카메라는 그를 화면 정중앙에 굳건하게 배치하고, 화려한 백라이트 조명을 통해 과거의 위상을 재현한다. 녹색 의상과 밝고 진한 색채의 조명과 살아난 스킨톤은 오프닝시퀀스의 톤과 유사한 느낌으로, 전성기 당시를 떠올리게 한다. 영화 마지막에서야 전설의 프로레슬러 '램'의 부활을 알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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