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하탄 (1979)

2023. 3. 29. 00:22샷바이샷

 

 마흔살이 훌쩍 넘은 나이, 예술을 하겠다고 일자리를 그만 둔 상황, 지금 만나는 사람은 자신의 딸뻘인 여자아이 그리고 절친의 내연녀. 아이작의 상황은 그야말로 천방지축이다. 자신이 이 낭만적인 도시에서 누구보다 지적이고 능력이 있다는 허황된 자신감에 빠져 있지만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자기모순에 빠진 비관주의자일 뿐이다. 애써 모른 척 하고 있지만, 자신의 처지를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기에 가장 조급한 것이며, 그런 본인의 모습을 인정하다가도 결국 과거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카메라는 어디 보여주기 싫은 그의 인생을 지독할 정도로 쫓아다니지만 어느 순간에는 가차없이 두고 가거나 남기기를 반복하는데, 질이 쓴 책이 말대로 영화화가 된다면 그대로 이런 영화가 되지 않을까 싶다. 과거의 이야기인줄만 알았던 이야기는 결국 현재진행형이다.

 

 


익스트림 롱샷과 롱테이크, 길고 넓음의 미학

 

 씬을 여는 하나의 샷처럼 보였던 넓은 롱샷은 프레임 인한 인물이 긴 대화를 나누고 화면 밖을 나설 때까지 유지된다. 때문에 샷들 중 가장 섬세하고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는 롱테이크는 이 영화가 작은 디테일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눈치챌 수 있는 장면이다.

 

롱샷 ① 실내 트레이시와 아이작의 대화

 

 

 첫번째 장면, 우측의 계단을 내려오던 아이작이 화면 좌측에 있는 트레이시와 대화를 한다. 바로 대화 상대인 트레이시에 다가가는 것이 아닌, 주방에 들러 불을 켜는 행위가 동선 사이에 있는데 2층 조명을 제외하면 비교적 어두웠던 노출의 균형이 얼추 맞고 샷의 깊이감이 더해진다. 그리고 트레이시와 한참을 대화 후 2층으로 올라간다. 결국 트레이시와 자신의 관계에 대한 일방적인 설교에 가까웠던 이 대화는 그 대화 내용 그대로 아이작이 처음 내려왔던 그 계단으로 트레이시를 데리고 올라가서야 마무리가 되는 직관적인 이미지이다. 요지부동인 열일곱 소녀의 마음처럼 픽스샷처럼 보이던 이 샷은 사실 마지막에 인물들의 동선을 따라 아주 살짝 우측으로 패닝되는 움직임이 있다.

 

롱샷 ② 새벽의 다리 옆 아이작과 메리의 대화

 두번째 장면, 동이 틀 때까지 대화를 나누던 아이작과 메리의 모습을 카메라가 뒤에서 잡았다. 그들이 즐기고 있는 도시의 풍경을 관객인 우리도 바라볼 수 있게 반짝이는 다리의 이미지가 화면의 반절 이상을 차지했다. 인물이 있는 쪽에는 아무런 조명도 치지 않아 인물들의 모습이 실루엣처럼 보이게 되고, 우리는 자연히 두 사람의 대화를 따라 아이작이 사랑하는 이 아름다운 도시의 풍경에 시선을 두게 된다. 뿐만 아니라 두 사람이 일어나 비틀비틀 카메라 쪽을 향해 걸어오는 마무리는, 영화에서 보이지 않은 시간 동안 그들이 얼마나 많은 대화를 했는지 압축해서 보여주는 듯 하다.

 

롱샷 ③ 미술관에서 아이작과 메리, 가까워지는 관계

 세번째 장면, 미술관 장면. 처음 블로킹된 흰색 벽에서 아이작과 메리가 걸어나오고 두 사람을 트래킹한다. 걸어가는 인물들 앞에 두번 블로킹되는 벽은 속도감을 더해주고, 관객들로 하여금 자꾸만 가려지는 인물과 그들이 나누고 있는 흥미로운 대화 주제(그들의 이전 인간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더욱 따라가고 싶게 만든다. 두번째 벽을 지나고 카메라의 트래킹 속도가 줄어들자 인물들이 이젠 우측이 아닌 카메라쪽, 즉 앞을 향해 걸어와 선다. 흑백 화면 속의 사각형 프레임들은 마치 미로 같은 이미지도 주며 서서히 가까워지고 알아가는 두 사람의 관계를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씬이 아닐까.

 

롱샷 ④ 트레이시의 학교 앞 아이작의 모습

 네번째 장면, 학교 앞에서 트레이시를 기다리는 아이작의 모습. 부러 인물에 비해 또 헤드룸을 넓게 잡고 그 넓은 공간을 학교라는 공간으로 가득 채운다. 'THE CALTON SCHOOL'이라는 텍스트가 화면 중앙에 크게 위치해 있어 그 외각에 자리하고 있는 아이작의 모습이 언뜻 딸을 기다리는 학부형의 모습처럼 비춰지기도 한다. 또한 영화 전체적으로 의도적인건지, 어쩔 수 없었던건지 계속해서 화면 속의 다른 사람들을 지나가게 하거나 위치시키는데 자신이 특출난 사람이라고 생각하던 아이작, 이렇게 보면 예일이 아이작에게 '우린 그저 인간이야'하고 꾸짖었던 것처럼 이렇게 보면 한없이 작고 평범한 하나의 인간이다. 학교를 마친 학생들이 쏟아지듯 문으로 나오고, 트레이시를 발견한 아이작은 사람들 사이에서 우측으로 프레임 아웃한다.

 

 

 


어둠 속의 낭만

 

화면 전체를 삼킨 달의 이미지에서 트래

 블랙 화면에서 디졸브되자 커다란 달의 이미지가 등장한다. 아이작과 메리 두 사람의 대화 소리는 들리지만,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이 달을 트래킹 하다가 화면 우측의 공간이 열린 곳, 또 다른 블랙에서 두 사람이 등장한다. <맨하탄>은 대화가 영화의 중요한 부분인 만큼 이런 특수한 공간부터 좁고 작은 공간도 어떻게 하면 이전 컷과 자연스럽게 이어지되 더 대화에 집중시킬 수 있을지 연구한 티가 많이 난다. 단순하지 않은 씬의 첫 시작. 

 

우주에 있는 듯한 두 사람의 L.S 픽스샷

 두 사람이 막 행성에 떨어진 듯한 이 샷 역시, 화면의 위쪽 반 이상을 어둡고 빈화면이 차지한다. 밋밋할 수 있는 화면의 좌측에 바위를 블로킹하여 입체감을 살리고, 두 사람이 화면 중앙 쯤 도달했을 때 앞쪽에서 한 남자가 지나가다 앞쪽을 향해 셔터를 누르는 액팅을 한다. 이 또한 이 기나긴 샷의 재치를 더하는 방법 같다. 아이작과 메리 두 사람은 좌측, 앞쪽 남성은 우측에서 강하게 조명을 쏴서 인물의 실루엣을 살렸다.

 

실루엣 샷

 반면 인물이 카메라에 가까워 샷 사이즈가 커진 이 화면에선 배경의 빛 외의 인물에 닿는 모든 빛을 차단하여 완전히 암을 지게 만들었다. 우측에서 프레임한 두 사람이 카메라 앞으로 위치할 동안 화면의 우측에만 치우쳐 있는데, 그 동안 남은 좌측의 공간은 지나가는 행인의 실루엣이 잠깐 채운다. 

 

암흑에서 프레임 인한 실루엣 W.S

 완전히 암흑으로 보이던 화면의 우측에서 두 사람이 프레임 인 하여 화면 중앙에 잡는다. 유지될 줄 알았던 이 정직한 투샷은 아이작을 남겨두고 먼저 프레임 아웃한 메리로 인해 상당히 고독한 아이작의 단독샷으로 전환된다. 인물의 뒤쪽에서 역광이 되도록 그리고 살짝 아래쪽에서 쏜 조명은 인물의 옆태만 살짝 살리는 실루엣을 만들었다. 인물의 표정을 추측할 수 없기에 잠시나마 완성되는 투샷, 그리고 혼자 남겨진 아이작의 단독샷의 배치, 여백을 통해 감정을 추측할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실루엣 클로즈업 점프컷

 클로즈업은 프레임 아웃한 샷 뒤로 다소 갑작스럽게 시작된다. 점점 더 고조되고 솔직해지는 대화처럼 인물샷이 훨씬 타이트해졌으며 배경의 별빛과 두 인물의 가까운 실루엣을 통해 어쩌면 이 영화에서 가장 로맨틱한 장면이 완성되었다. 조명은 뒤쪽에서 역광으로, 인물들 사이에서, 살짝 하단에서 쏴서 보일 듯 말 듯, 정보값을 줄이는 만큼 관객이 추측해야 하는 부분들이 많아져 굉장히 오묘한 실루엣샷이다.

 

 

 


롱테이크 속 결합과 고립의 반복

 

롱테이크 ①

 집에 들어온 상황에서 우측의 벽 하나를 걸어 더 좁은 프레임처럼 만들었다. 아이작과 메리 두 사람은 끊임없이 이 정해진 프레임에서 인/아웃을 한다. 아직 예일을 잊지 못해 혼란스러워 하는 메리와 예일의 뒷말에 넘어가 갑작스레 적극적인 표현을 하는 아이작, 그야말로 밀고 당기는 모습이 한 씬으로 압축해서 담겨졌다. 대체로 한 사람이 프레임 인 하면 다른 한 사람이 프레임 인을 하는 패턴이 반복된다. 두 사람이 키스를 하며 잠깐 합쳐짐에도 메리가 화면 밖으로 나가는데, 우측 벽을 바라보고 서있는 아이작의 이미지에서 답답함이 느껴진다. 또 화면 밖의 메리를 아이작이 따라가 잠시 동안 빈 화면에서 인물들의 목소리만 들린다. 또 빈 화면을 다시 메리가 보이지 않는 투샷을 회피하려는 듯 나오며 채우는데, 이를 또 아이작이 따라와 투샷을 완성한다. 흔히 좁은 공간은 영화 촬영의 극악의 환경이라는 변명이 무색하게, 상황과 동선, 구성만으로 이토록 다채로운 샷을 만들 수 있구나.

 


롱테이크 ②

 질이 낸 책을 읽으며 항구를 걸어가는 일행의 모습이 우측에서 프레임 인 한다. 그리고 멈춰선 아이작을 두고 웃으며 먼저 프레임 아웃 하는 친구들. 내연녀의 존재 등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과거의 일은 과거의 일이라고 여기며 현재를 살아가는 친구들과, 아직도 과거에 붙잡혀 있는 아이작의 모습을 프레임 하나로 연출한다. 애써 타협하려는 듯 그들을 따라 아이작이 프레임 아웃하는데, 빈 화면 속 바다에서 그의 쓸쓸함과 잡념이 느껴진다.

 

 


 빈 화면에 이어서 바로 질의 집에 찾아간 아이작의 얼굴이 클로즈업으로 이어진다. 이전 컷에서 타협한 듯 보였던 그의 모습은 아주 찰나였나 보다. 협박하는 어투와 일그러진 표정의 갑작스럽고 거대한 등장은 당황과 거부감을 느끼게 만든다.

 

 이런 첫 클로즈업에서 움직이는 아이작을 그대로 패닝하여 아이작 O.S 질의 투샷으로 전환된다. 뒤에 있는 코니까지 합하면 쓰리샷일까. 아무튼, 씬의 전환과 동시에 장소와 상황을 빠르게 훑듯이 보여주는 방법이다. 단 한 번의 빠른 컷으로 아이작의 격양된 감정이 이전 항구 씬에서 그대로 이어진다.

 

 이전의 질이 등장했던 씬과 마찬가지로 아이작이 오면 항상 질은 바빠진다. 잠깐의 투샷이 무색하게 빠르게 화면 밖을 벗어나려는 질을 아이작이 그대로 쫓아가며 투샷을 유지한다. 방 안으로 들어간 질이 또 아이작의 O.S로 보여진다. 롱테이크에서 샷의 사이즈를 다양하게 바꾸는 것은 긴 샷을 효과적으로 끌고 가게 만드는 방법이다. 그리고 멈춰 있는 카메라와 아이작에게 다가온 질이 다시 아이작과 카메라 사이를 스쳐지나간다.

 

롱테이크 ③

 카메라가 돌아서는 아이작을 따라 180도 회전하며 다시 코니의 방향을 비춘다. 대화 상대가 질에서 코니로 잠시 바뀌었다가 다시 질으로 전환되자 또 같은 패턴으로 코니가 프레임 아웃하며 마지막엔 아이작과 질의 1:1 투샷으로 마무리된다. 질의 집에서 중심 인물은 아이작처럼 보이지만, 사실 모든 움직임은 질을 통해 이루어진다. 결국 질에게 어떤 설득, 협박도 통하지 않았던 결말처럼 말이다.

 

 질의 등장은 영화 1시간 36분으로 치면 그렇게 많은 부분을 차지하지는 않지만, 나올 때마다 엄청난 존재감을 보여준다. 그런 존재감을 만드는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이 길고 어지로운 롱테이크가 아닐까 싶다. 아이작이 트레이시와 있을 때 가장 편안하다고 했던 것처럼, 비교적 정적인 샷들이 많았던 트레이시와 다르게 다른 인물들과의 만남에서는 카메라가 끊임 없고 긴 움직임을 보인다. 계속해서 인물들을 정신 없이 따라다니는 카메라, 그리고 카메라가 중간중간 멈춰서는 순간에 완벽하게 배치된 인물의 구도는 설명하기 힘든 쾌감을 선사한다. 이런 롱테이크를 볼 때마다 롱테이크는 선과 선이 꼭지점처럼 모여서 마치 하나의 도형이 제작되는 과정 같다는 생각이 든다.

'샷바이샷'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 (2007)  (0) 2023.04.10
더 레슬러 (2008)  (0) 2023.04.03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2001)  (0) 2023.03.19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2008)  (0) 2023.03.15
콜드 워 (2018)  (0) 2023.0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