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3. 19. 17:02ㆍ샷바이샷
아주 어렸을 때 주말 아침마다 아이들을 위한 애니메이션 영화를 틀어줬던 텔레비전 채널이 기억이 난다. 나는 그 채널의 부지런한 관객이었다. 매 주말 아침마다 아직 잠이 덜 깼을지라도 잠옷을 입은 채 꾸역꾸역 티비 앞에 앉았어야만 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나의 만남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때 이 영화는 나에게 아주, 엄청 무서운 영화로 기억되었다. 그도 그럴게, 음식을 먹고 돼지로 변한 부모님이라니! 십년 동안 나에게 <센과 치히로> 하면 떠오르는 장면은 그 장면 밖에 없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렇게 기억된 영화와 다시 만난지 무려 십여 년만이다. 어렸을 때 아무 생각 없이 봤던 이 영화가 뜯어보면 얼마나 세세하고 아름다운 디테일을 가지고 있는지, 얼마나 좋은 메세지를 전달하고 있는지 늦게나마 깨달아서 기쁘고 특별한 시간이었다.
공간적인 매력
<하울의 움직이는 성>, <천공의 성 라퓨타>, <마녀배달부 키키> 등 지브리 영화 대부분의 배경이 근현대 유럽, 또는 특정 국가를 따로 배경으로 정해놓지 않았다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신들의 목욕탕이라는 거대한 장소를 바탕으로 화면 전체를 전통 일본 문화의 것들로 가득 채운다.
영화 내내 대부분 정지되어 있던 카메라가 높은 일본식 목욕탕 건물을 묵직하고 느리게 틸트 다운 하며 그를 바라보는 치히로를 비춘다. 거대한 크기를 실감하게 하는 화면의 움직임. 특히 새롭거나 커다란 장소를 비출 때 카메라가 틸트 혹은 패닝하고, 치히로를 화면 끝에 세우는 방식이 사용되었다.
목욕탕 내부의 직원들이 생활하는 일본 전통식 주거 공간의 미를 가장 잘 드러낸다. 다다미방과 목재로 이루어진 내부는 마치 우리가 그 공간에 있는 것처럼 진한 옛날 향기를 느끼게 된다. 밖에서 본 형태는 일본의 대표적인 주거 공간 중 하나인 멘션을 떠올리게도 한다. 실내의 화면은 마치 광곽렌즈로 찍은 듯 실제보다 넓고 깊게 구성되어 있는데, 좁은 공간 속 다닥다닥 붙어있는 캐릭터들을 통해 활기와 생동감을 느낄 수 있다.
그에 비해 목욕탕 건물 최상층에 있는 유바바와 바오의 공간은 서양식이다. 또한 이전 공간에 비해 사람 대신 수많은 패턴과 가구로 구성되어 있는데, 비교적 훨씬 더 밝은 조명들로 이뤄져 있지만 움직임 없이 죽어있는 듯 하여 이 공간에 들어설 때 작은 치히로는 유난히 더 작아져 보인다. 화면 상단, 좌우에 여백을 크게 주어 공간에 압도하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치히로가 유바바 그리고 제니바와 처음 대면했던 장면도 상반된다. 서양식 건물과 가구의 패턴들이 마치 유럽의 왕궁을 떠올리게 하는데, 이는 마법으로 이 세계를 지배하는 유바바의 권력과 그가 가진 마법의 힘을 상징하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이에 반해 마법에 대한 가치관이 유바바와 상반된 쌍둥이 마녀 제니바의 집은 어떠한 화려한 패턴이나 강한 빛 없이 투박하다.
두 마녀의 등장 역시 상반되는데, 치히로를 어떻게 본인들의 공간에 들어서게 했는지 살펴보면 두 캐릭터의 차이점이 두드러진다. 치히로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코나 얼굴의 특정 부위를 강조한 클로즈업샷과 치히로의 반응샷을 배치하고 자신의 공간에 들어서지 않는 치히로를 마법으로 방 안으로 끌어당기는 유바바. 반면에 제니바는 치히로의 시점에서 보이지 않은 상태에서 목소리만 들려왔다는 것은 유바바의 첫등장과 동일하지만 치히로가 스스로 집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문을 잡고 기다렸다는 정보가 문이 닫히고 나서야 제시된다. 카메라의 시점에서 캐릭터가 보이지 않는 위치에 있어 처음엔 마치 자동으로 문이 열린 것 같다는 착각을 주는 재밌는 장치이다.
이렇게 강제적, 또는 자의적으로 공간에 들어오고 이어지는 다음 컷. 유바바의 공간에 들어온 치히로의 시점샷은 좁은 화면과 제한되고 정지된 구도 때문에 답답한 느낌을 주는데 함부로 움직일 수 없는 치히로의 처지가 잘 드러난다. 반면 제니바의 공간은 집 전체가 보일 정도로 와이드하게 잡았으며 이전에 스스로 걸어 들어왔다는 점 때문에 이 컷에서도 치히로의 움직임이 자유롭다. 롱샷에서 화면의 왼쪽 끝으로 향한 제니바를 치히로가 잠시 뒤에 빠르게 쫓아간다. 물론 이 차이점에는 치히로의 내면적인 성장과 나름대로의 결단도 영향이 없진 않았겠지만 캐릭터의 움직임을 결정하는 화면의 구도 또한 큰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정지된 카메라와 캐릭터의 구도
영화를 다 보고 나서야 깨달은 점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는 화면(카메라)이 대부분 움직이지 않고 픽스된 상태라는 점이다.
캐릭터가 고개를 돌리거나, 눈을 깜빡이거나 하는 작은 디테일들은 정지된 프레임 속에서 더 크게 눈에 띄는 것 같다. 마치 인물이 정말로 살아 숨쉬는 것처럼 말이다. 중심 캐릭터 뿐만 아니라 프레임 끝에 위치한 직원, 요괴 등의 엑스트라 캐릭터 또한 프레임 단위로 움직이는 모습이 마치 화면 자체가 살아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한다. 화면 대부분이 픽스된 상태라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싶다.
목욕탕 건물 앞에 유일하게 연결된 붉은 다리는 치히로와 이세계를 이어주는 매개체이자 영화 전반적으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장소이다. 영화 초반, 황혼이 찾아오자 치히로는 하쿠에게 떠밀려 급히 떠나는데 이 부분에서 두 사람 뒤 건물을 로우 앵글로 촬영하였다. 어두워지는 화면과 함께 이전 컷에서 나왔던 같은 건물을 훨씬 거대하고 위협적이게 연출해낸 부분이다. 반면 영화의 후반부 치히로가 하쿠의 이름을 찾아주고 유바바에게 돌아왔을 때 이 다리를 하이앵글로 촬영하였다. 목욕탕 건물도 보이지 않을 뿐더러 이전의 위압감이나 기묘한 느낌은 사라졌다.
이런 화면의 구도나 움직임은 치히로의 변화에도 함께 바뀌어 간다. 영화 초반부의 치히로는 두려움에 스스로 움직이지 않거나 가만히 주저앉아 있었고 그때마다 하쿠나 린,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이끌려가는 수동적인 모습이 많았다. 영화의 초반부인 (1), 후반부의 (2) 두 장면은 치히로가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 해쳐나야가는 중요하고 비슷한 순간임에도 비교되는 점들이 많다. (1)처럼 혼자 남게 되는 순간에는 치히로의 시점샷(무려 3컷이 사용되었다)이나 인물보다 공간을 압도적이게 많이 잡은 정적인 화면들 덕분에 치히로의 두렵고 긴장되는 심리가 잘 드러난다.
그러나 후반부의 센은 시점샷은 현저히 적어졌으며 분명 훨씬 더 위험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공간의 압박감이나 샷들보다 치히로라는 캐릭터가 화면의 중심이 되고 주도하는 샷들로 주로 구성하였다. (2)의 세번째 컷에서는 건물 꼭대기에서부터 천천히 틸트 다운 해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작은 치히로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높은 건물을 따라 내려가는 카메라와 반대 방향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치히로의 모습을 통해 내면의 성장과 결단을 짧지만 강하게 보여주는 씬이라고 생각한다.
빛과 조명
여타 애니메이션에서는 광원과 명암을 세세하게 설정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아마도 제작비나 기술적인 한계 등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빛보다는 인물의 동화나 외관 같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부분들을 신경 쓰는게 보통이다. 그러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인물, 장소를 무엇보다 매력적이게 만들어주는 것은 바로 사실주의적 조명이다. 마법 같은 순간들 속에서 정지된 카메라와 철저하게 사실적인 빛과 그림자는 이 영화를 더욱 매력적이게 만든다.
치히로가 어떤 공간에 처음 진입하는 순간에도 빛과 그림자를 이용했다. 어떠한 공간 또는 인물을 완전하게 드러내기 전에 궁금증을 자아내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특히나 영화 초반부에 많이 활용된 모습이다. 하쿠의 조언으로 찾아간 가마 할아버지와의 첫 만남에서도 벽에 드리운 그림자를 통해 호기심을 발생시킨다. 보일러실의 광원은 불을 포함한 광원이 여러개이기 때문에 가마 할아버지의 그림자가 여러개로 나누어져 보이는데 마치 이로 인해 발생한 그림자 모양이 요괴나 몬스터를 상상하게 만든다. 또한 승강기 최상층 전에 멈춰선 곳은 아마 성적인 유흥을 즐기는 장소일텐데, 닫힌 문들 사이로 여러 요괴들의 그림자만 보이게 만들었다. 어린 아이인 센의 시점에서는 알 방도가 없기에 관객에게 추측할 수 있는 단서만 제공하고 짧게 지나간다.
인물들에게 드리운 명암들은 많은 것을 생략한 듯 보이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굉장히 사실적이다. 모든 장면마다 광원이 정해져 있고, 시간대와 장소에 따라 다양한 빛깔을 만들어 인물을 비춘다. 다양한 시간대와 장소적 특징을 결합한 빛의 색을 통해 만들어내는 것은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에 틀림 없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반면 다른 캐릭터에 비해 유바바의 얼굴에는 그런 조명의 명암의 역할이 톡톡히 드러난다. 깊은 주름 사이사이 빼놓지 않고 들어간 그림자는 유바바라는 인물을 한껏 더 기괴하고 공포스럽게 만든다.
신과 요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로그라인이 '신들의 세계에 떨어진 인간 아이 치히로의 모험'이다 보니 이 영화 전체적으로 신과 인간의 대비, 그리고 대치적인 상황도 주로 그려진다.
영화의 초반부에 등장한 돌 사당과 석상들. 이끼가 껴 방치된지 꽤 오래 된 듯한 모습이다. 궁금해하는 치히로를 뒤로 하고 부모님은 무심하게 스쳐지나가는데, 이는 시간이 흐르면서 신을 믿지 않게 된 현대인들을 나타내는 이미지이다.
이 때문에 인간 세계에선 형체 없이 투명한 모습이었던 신 또는 요괴들이 강을 건너 신들의 세계에 들어서자 형체가 생긴다. 마찬가지로 형체 없는 얼굴 없는 요괴 가오나시, 불투명한 모습에다 외롭다는 말을 연신 되풀이한다. 신이나 요괴는 인간들의 숭배, 혹은 믿음으로 형체나 힘을 유지한다는 옛말이 떠오른다. 어쩌면 이들은 인간들이 신을 소외하기 전까지는 지금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거대한 형태였을지도 모른다.
치히로가 구해준 강의 신의 모습과도 연결되는데, 신이나 요괴는 상징물이 있으며 이는 대부분 자연적인 것이다. 자연을 소홀하게 여긴 인간들은 현대의 발전으로 인해 급속하게 환경을 오염시키기 시작했으며 그로 인해 망가진 모습이 자연과 인간, 신과 인간의 대립을 상징한다. 이를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아이인 인간 치히로가 이를 구해준다는 모습 또한 기억에 남는데 많은 것을 돌아보게 하는 메세지이다.
누마노소코 역으로 향하는 전철, 가마 할아버지는 열차표를 센에게 쥐여주며 이런 말을 했었다. "예전에는 돌아오는 차가 있었지만 요즘에는 가는 것 뿐이다." 이 또한 인간이 신을 소외하기 시작했다는 의견과 이어진다. 일본엔 일반 가정집에도 부쓰단(仏壇)을 놓아 세상을 떠난 사람을 추모하는 문화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 점점 사라지는 추세라고 하는데, 이런 현대 문화를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편도 밖에 없는 전철은 이는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의 '단절'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기억하고 기다려주는 사람이 없다면, 죽은 자 역시 돌아갈 길이 사라져 흐릿해질테니 말이다.
이별으로 시작해서 이별으로 끝나는 이야기
영화의 첫 시작인 치히로의 시점샷, 오래 지낸 친구들과 헤어졌다는 상징인 꽃다발과 그 안에 있는 카드 속 메세지를 클로즈업으로 보여주며 시작한다. 치히로네 가족은 이사를 가고 있으며, 이사로 인한 이별이 마냥 슬프고 새로운 장소에 크게 거부감을 드러내는 치히로의 상태를 짧은 오프닝 시퀀스 하나로 함축했다.
어두운 하늘이 개고 그 동안 물이 차올라 건너갈 수 없었던 장소에 두 사람이 도착한다. 이곳에 차올랐던 물은 망자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연결하는 강인 삼도천을 상징하는 것 같다. 이곳까지 바래다준 하쿠는 여기서부터는 자신은 갈 수 없다며 치히로와 이별할 준비를 한다. 이전의 치히로가 그토록 싫어했던 이별 말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배경에 수놓인 푸른 하늘과 뭉게구름. 일본 애니메이션 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이다. 이는 희망 성장, 미래 등 많은 긍정적인 감정을 느끼게 한다. 이별은 지금의 치히로에게 더이상 두렵고 아픈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꼭 잡은 손이 천천히 떨어지고 나서 남은 하쿠의 손도 천천히 화면 밖을 나가 완벽히 프레임 아웃한다. 아무 것도 남지 않은 빈 공간을 꽤 오랫동안 보여주는 화면은 언뜻 보면 마가 뜬 것 같은 시간이지만, 두 사람의 미련과 아쉬움을 나타낸다.
손을 놓고 난 뒤 무사히 부모님과 재회한 치히로는 잠시 뒤를 돌아보려고 하다가 하쿠와의 약속을 떠올리곤 앞을 향해 나아간다. 결단한 치히로의 마음처럼 카메라는 뒤를 비추지 않고 터널을 빠져나가기 전까지 치히로의 앞만 향해 있다. 하쿠나 그 동안 만났던 다른 친구들의 모습은 영화 끝까지 비추지 않는다는 점이 냉정하게 느껴지면서도 아쉬운 지점일수도 있지만, 터널을 나갈 때까지 뒤를 돌아보지 않겠다는 약속을 카메라도 끝까지 지키려고 노력한다.
영화의 결말에서 터널을 빠져나온 치히로가 신들의 세계에서 겪었던 일들을 기억하고 있는 것인지 많은 추측이 오고 간다. 터널 안은 망각을 상징하듯 까맣게 물들어 있고, 터널 주위의 풀들은 시간의 경과를 상징하듯 무성하게 자라나 있다. 개인적으로는 치히로가 완전히 기억을 잃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치히로가 바라보는 터널의 이미지가 나타내는 것처럼 아주 오래 전 일처럼 이 사건을 기억 저편에 담아둘테다. 분명 이전에 하쿠가 치히로의 이름만은 기억하고 있던 것처럼, 하쿠와의 오래전 만남을 기억해낸 치히로처럼 어렴풋이라도 기억하고 있을 것이며, 그들이 꼭 약속한 것처럼 어디선가 또 만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는 희망적인 장면이다.
터널을 바라보는 치히로의 표정에서 슬픔, 아쉬움, 미련, 무감정까지 다양한 감정이 스쳐지나가는 것 같다. 그리고 몸을 돌릴 때 제니바와 친구들이 만들어줬던 머리끈이 아주 잠깐 반짝인다. 치히로가 프레임 아웃 하고 난 뒤에 빈 공간을 꽤 오랫동안 잡고, 자동차 문이 닫히는 소리까지 들리고서야 컷이 전환된다. 캐릭터가 프레임 밖을 나가고 나서도 꽤 오랫동안 방치되는 빈 화면은 적어도 치히로가 느꼈던 많은 일과 기억들이 무(無)가 되지 않았음을 추측하게 한다. 돌아가고 싶고 다시 보고 싶은 수많은 감정을 이 빈 화면에 남기고, 치히로는 떠나는 것을 선택한다.
나는 아직도 성장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어렵다. 그러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보고 조금은 확답을 내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장이란 그 어떤 두려움도 아쉬움도 뒤로 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이다. 물론 그것을 잊어버릴 수는 없고 완전히 슬픔을 떨칠 수도 없겠지만, 단순히 기억과 성장의 발판으로 만들어 나아갈 수 있는 힘 말이다.
이 영화가 아직까지도 좋은 영화로 평가 받는 이유는 넌지시 전하는 성장에 대한 메세지 때문이다. 지브리 영화는 대체적으로 인생에 대한 주제를 담고 있는데, 어른이 되어 다시 보면 더 좋은 깨달음을 얻게 해주는 것 같다. 어른을 성장 시켜주는 이야기, 이것이 진정한 성장 영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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