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3. 8. 11:53ㆍ샷바이샷
제목처럼 냉전시기라는 사회적 배경 속에서 피어난 사랑 이야기
줄라와 빅토르는 비슷한 인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매우 다른 유형의 사람이다. 공산체제에서 빠져나가 자유로운 음악을 하고 싶은 예술가 빅토르, 자신의 삶의 안정을 위해서라면 공산체제에도 순응할 수 있는 줄라. 두 사람은 이런 세계에서 만나 애틋해졌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또 이런 세계 때문에 헤어짐과 만남을 반복한다. 이런 둘을 담은 카메라는 1:37 이라는 좁은 화면비 속, 빠르게 변화하는 상황에 따라 서늘할 정도로 차갑고 정적이게 또는 불안할 정도로 자유로운 움직임을 반복한다.
'사랑은 외부의 충격이 가해질수록 단단해지고, 유달리 내부의 균열엔 취약하다.' 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영화가 아닐까 싶다.
00:25:08 ~ 00:27:30
약 1분 50초의 긴 롱테이크 씬이 시작된다.
이처럼 빅트로가 화면에서 아웃되자 홀로 남은 홀로 남은 줄라의 단독샷은 단숨에 불안해진다. 누구보다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에게 의지하기 때문에 한 사람이 사라졌을 때 홀로 남은 화면의 공백은 더욱 커보인다.
이어지는 롱테이크, 여전히 줄라의 움직임을 카메라가 따라간다. 화가 난 줄라의 거친 발걸음과는 상반되게 짐벌을 사용했다.
영화의 극초반인 산간지방의 민요를 부르는 사람들이 등장할 때는 전통과 자유를 담는 카메라, 핸드핼드를 사용한다. 또는 파리에서 재회한 두 사람이 춤을 추는 장면에서도 대부분 핸드헬드가 사용된다. 그러한 순간에서 인물들은 더할 나위 없이 자유롭고 아름다운 연인처럼 그려진다. 그러나 두 인물이 현실 속에서 갈등을 겪는 순간마다 카메라는 멈춰서거나 절제된 무빙으로 건조하게 인물을 따라가기만 한다.
과할 정도로 비어있는 화면의 여백은 인물을 더 작고 불안한 존재처럼 보이게 한다. 이런 이미지들은 처음 마주했을 때는 어색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별도의 설명이나 대사 없이도 간단명료하게 상황과 감정을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아마도 이 영화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 중 하나. 영화 속 가장 영화 같은 장면은 항상 가장 오래 기억되기 마련이다. 이질적이기도 하지만, 한 폭의 명화를 떠올리게 하는 슬프고 기묘한 장면. 떠내려가는 줄라를 카메라가 천천히 달리로 따라간다. 아래로 뛰어들고, 물에 떠다니다 프레임 아웃하는 이 이미지는 어쩌면 영화의 결말(자살)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
이후 별도의 연결 없이 바로 빅토르의 단독샷으로 CUT TO 한다.
대화 없이, 그저 모닥불 앞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 파벨 파블리코브스키 감독은 샷의 생략과 지속에 가감이 없는 사람이다. 다소 갑작스러운 샷들도 아름다운 이미지만으로 설명을 대신하기도 한다. 이 두 샷은 서로가 서로를 용서했음을 보여주는 샷이 아닐까 싶다. 그 어떤 차가운 시련도 그들의 타오르는 사랑을 막을 수는 없을테니.
00:31:30 ~ 00:35:32
파벨 파블리코브스키 감독의 시그니처, 넓은 헤드룸으로 만든 공허한 인물샷. 이런 샷들은 간혹 어떤 사이즈의 샷들로 불러야 할지 당혹스러워질 때가 있다. 분명 인물을 기준으로 하면 B.S 혹은 M.S이겠지만 아주 넓은 L.S처럼 보이게 하는 매력이 있다. 약속의 날, 기대되는 것보다 두려운 마음이 드는 복잡한 빅토르의 심정을 함축해서 보여주는 이미지 샷.
이 샷에서도 역시 빅토르에 비해 좌측 여백을 넓게 잡았고, 그 공간을 공산당원들이 가득 채운다.
빅토르가 화면 밖을 나가기 채 전에 과감히 컷을 하고 다음 샷으로 넘어간다.
이에 대비되게 이어지는 줄라의 클로즈업샷. 앞에 거울이 블로킹되어 답답한 느낌을 주고 줄라의 불안한 감정을 나타낸다. 이는 빅토르와 비슷한 감정이겠지만 자유와 사랑을 위해 떠나려는 빅토르와 달리, 줄라는 정해진 틀 속에서 순응하기로 결심했기에 이런 상반되는 첫 샷의 연출을 사용한 듯 하다.
투샷이 되자 앵글 안 인물의 위치는 더욱 대비된다. 카치마레크가 다가오기 전 홀로 있는 줄라는 좌측 프레임 하단에 작게 위치되어 있다. 카치마레크가 다가와서 앞에 서자 우리가 흔히 아는 스탠더드한 투샷이 완성된다.
이어지는 샷 역시, 보통의 B.S샷. 비정상적이고 이질적인 샷들의 연속 속에서 가끔 등장하는 이런 화면들이 더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애써 괜찮은 척 연기하는 줄라의 감정처럼 화면도 평범해진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두 사람이 떨어지고 누군가가 혼자가 되는 순간 카메라의 움직임은 단순하고 고요해진다.
좌우의 중간에 위치해있지만, 위쪽 공간을 반 이상 남겼다. 실제론 여러 사람 속에 둘러싸여 있지만 마치 혼자 있는 느낌을 준다. 마찬가지로 빅토르 역시 다른 공간이지만 비슷하게 이어지는 듯한 넓은 헤드룸의 샷. 이러한 비슷하지만 반대되는 샷의 분위기는 두 사람의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최종 선택과 향할 길이 결국엔 다를 것임을 이미 암시하고 있다.
빅토르의 시선을 따라가자 한 가족이 보인다. 정지된 샷으로 끝날 것 같았던 이 샷은 그들의 움직임을 따라 패닝하고 이내 프레임 아웃 한다.
비슷하게 이어지는 줄라의 샷, 두 사람의 모습이 끊임없이 교차편집으로 보여진다. 한 남성이 내민 손길을 받아 잠깐이나마 또 다시 스탠더드한 투샷이 완성된다. 그러나 그들을 형식적이게 쫓는 건조한 짐벌 팔로잉, 더불어 차가운 줄라의 표정이 별도의 대사 없이도 줄라의 감정을 드러낸다.
짧게 춤을 추고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온 줄라, 자리에 앉아 같은 앵글에 위치한다. 처음보다 여백이 줄어들긴 했지만, 술 한잔을 벌컥 들이키는 뒷모습에서 되려 더 외로워진 느낌을 받을 수 있다.
1949년부터 1964년이라는 긴 시대를 담은 영화인 만큼 시간과 해의 흐름이 과감하게 생략되고 이미지로 대체한다. 아까와 똑같은 위치에서 그대로 움직이는 인물을 패닝으로만 따라가다가 멈춰 어두운 거리로 걸어가는 빅토르의 뒷모습을 비춘다.
재밌는 점 역시 여기서도 빅토르가 채 사라지기 전에 블랙으로 암전시킨다는 점이다. 떠나는 인물임에도 화면 밖으로 사라지지 않고 내내 쫓아가다가 다소 애매할 수 있는 순간에 컷으로 끊어버린다. 사실 영화 전체를 뒤져봐도 그렇다. 그들 주위의 다른 사람이 프레임 인, 아웃하는 순간은 수 없이 많지만 이 두 사람이 화면 밖을 벗어나는 경우는 없다. 놓치지 않는다는 듯, 숨막힐 정도로, 끝없이, 쫓는다.
1:17:42~1:21:21
화장실에서 부둥켜 안은 두 사람의 모습에서 CUT TO, 흔들리는 버스의 전경이 보인다.
북적거리고 흔들리는 버스 안 가만히 창가를 응시하던 두 사람이 잠깐 마주본다.
아주 멀리서 찍은 L.S. 버스에서 내린 두 사람이 아주 작게 보인다. 천천히 좌측으로 프레임 아웃 한다. 영화의 종반부에서는 정지된 카메라 속에서 두 사람이 프레임 인, 아웃을 반복한다.
영화의 초반에서 카치마레크가 발견한 성당의 모습, 그리고 그때 보여졌던 인서트 샷들이 똑같이 나열된다. 다만 순서는 처음과 반대이다.
긴 롱테이크로 사랑의 서약을 하고, 약을 먹고 키스를 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마치 결혼식을 연상시키는 구도이지만 전쟁 후 폐허로 보이는 뒷배경, 위쪽의 넓은 여백이 두 사람을 비참하고 아프게 담아낸다.
감독의 전작 <이다>에서도 죽음의 결심부터 그 순간까지 고요하게 담아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변함 없는 일상과 평범한 대화 속에서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마감하는 생. 일상처럼 지나갔기에 더 충격적인 장면. 죽음이 이 인물들에겐 현실보다 더 나은 안식처이기 때문일까.
죽음을 기다리는 영화의 마지막 씬. 해질녘처럼 보이지만 그들에겐 마지막까지 영화 같이 아름다운 매직아워는 보이지 않는다. 화면 밖 풍경을 바라보다가 줄라가 이끄는 손을 붙잡고 더 좋은 풍경이 보이는 곳을 찾아 이동한다. 그곳에서는 노을이 보일까. 두 사람이 아웃한 후 한참을 빈 공간을 보여주다 이내 화면이 암전된다.
이렇게 빅토르와 줄라를 화면 밖에서 내보내지 않는 마무리들이 이 마지막 씬에서의 프레임 아웃을 더 특별하게 만든다. 두 사람을 자유롭게 만들어주는 것은 서로의 존재 그리고 세상으로부터의 탈출이었다. 드디어 두 사람의 마지막은 카메라가 쫓아가지 않는다.
끝내 죽음으로서 자유를 얻게 된 두 사람을 이제는 보내준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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